미해병 용사가 된 쟈니
"미해병대에 종군했을 때의 아름다운 추억을 잊을 수가 없어요."
- 한국전쟁 때 미해병대 통역으로 종군한 쟈니 남.
1951년 초 피난지 경북 영천에 새로 진주해 온 미해병대의 야전 키친에서 그릇과 솥가지를 닦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 그의 미해병대와의 첫 인연이다. 그의 나이 15세 갓 중학 3년생이었다. "미군 부대에 들어가면 먹는 문제가 해결되고 영어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남충일, 아니, '쟈니'(미해병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는 최근에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때 로서는 그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키친에에서 전선으로
육 남매 중 막내인 그의 집은 가난에 찌들어 그에게는 장래에 대한 희망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때의 한국의 가난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그의 삶에는 변화가 일고 있었다. 1953년 여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미해병대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근면과 기지 그리고 급속도로 향상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야전 키친의 그릇 닦기에서 미해병 5연대 1대대의 대대장 쟌 엘 합킨즈 중령의 개인 연락병(보조), 후에 부대 통역으로까지 진급했다. 합킨즈 대대장은 약관의 쟈니를 매우 좋게 보았고 미해병 연대가 동부 전선(강원도)으로 전진할 때 함께 가게 해주었다. "합킨즈 중령을 무척 존경했습니다" 라고 쟈니는 말했다. 그가 기억하는 합킨즈 중령은 정말로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미해병대에 종군하게 된 쟈니는 쉽게 그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해병군복과 장비 일체를 지급받게 되었다. "그들은 나에게 장비 일체와 소총까지 지급해 주얻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때부터 종전 후 미해병대를 떠날 때까지, 심지어는 어쩌다 어머니가 계시는 피난지 영천에 일시 휴가 갔을 때도 쟈니는 언제나 이 해병군복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다. "진짜 미해병이 된 기분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전선 근무
쟈니 남은 통역 근무 중 자원해서 1대대 A중대와 함께 최전방 전선 근무를 했고, 한국전 최악의 치열한 전투를 겪었다. 적군의 대포 박격포 공격, 소형 무기와 기관총 공격으로 아군이 산산조각이 나고 전사ㆍ전상 당하는 것을 전장에서 겪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악몽이었다.
쟈니는 포탄 공격 때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재빨리 터득하였다. "대포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면 얼굴을 아래로 보고 땅에 납작 엎드린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많은 해병병사가 포탄의 파편으로 전사 및 부상을 입었다." "적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나면 많은 해병 사상자가 트레일러에 실려 후송되곤 했는데, 그중에는 내가 친히 아는 해병도 있었다." 그의 전방 근무 중 가장 잊히지 않는 광경은 한 부상 해병 병사가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위생병이 배 밖으로 터져 나온 그의 내장을 몸 안으로 주워담고 임시 봉합하는 것을 보았을 때이다. 그의 기억으로 위생병들은 참으로 용감하고, 전상 해병을 돕는 일에 충실한 용사들이었다.
욕질, 커피, 문통
그러나 해병 용사들에게 휴식의 한 때 있다. 해병은 전선에서 적과 싸울 때
말고는 휴식 시간을 갖는다. "해병들한테 온갖 욕설을 많이 배웠어요." 라고
씩 웃으며 그가 말했다. 그의 기억으로는 "해병들은 커피를 많이 마셨고, 심지어 어떤 해병은 전장에서도 약식 증유기로 건포도 알코올을 만들어 마시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에게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뭐니 뭐니 해도 수많은 시간을 두고 들은 해병들의 미국과 고향 집 이야기들이다. "미국에 관하여 많은 것을 듣고 들게 되었고, 이내 미국에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한국전 정전 후 미국 대학에 갈 꿈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의 경제사정으로 갈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습니다. 늘 끼니를 걱정할 형편이었으니 미국 대학 꿈을 꾼다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었습니다."
쟈니의 친한 해병 병사 중 어떤 사람들이 자기 아내나 여동생에게 그의 이야기를 해 주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얼마 안 가서 쟈니는 미국으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게 되었다. "문통(편지의 주고 받음)이 내 영어 능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편지를 받으면 나도 짧은 영어 실력으로 문법, 단어, 스펠링 등을 총동원하여 낑낑거리며 편지 답장을 쓰곤 했어요."라고 그는 그때를 회상했다. 2년여의 기간의 쟈니의 넘버원 펜팔은 새크라멘토 캘리포니아 출신 해병의 여동생인 고교생 `바버라`였다. 지금은 이름 밖에 기억 못 하지만, 지금도 이따금 그녀 생각이 날 때가 있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면 한번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라고 그는 추억 어리듯 말했다. 결국 쟈니가 그녀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에게는 또 미국에서 선물이 답지했다. 애크론 오하이오 출신 해병의 부인으로부터는 겨울 코트, 코닥 카메라, 옥스포드 영어사전 등이 선물로 보내졌다. "미국 사람들은 정말 마음이 좋고 너그럽다."고 그는 말했다.
운 좋게 살아 남다
쟈니는 휴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9월 미해병대를 떠났다. "그 이후 다시
는 미해병대를 만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A 중대 일원으로 전방근무 시에는 생명을 위협받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내가 살아남은 것은 운이 좋았던 거지요."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말했다.
"전엔 미해병찬가 가사 From the The halls of Montezuma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고 노래를 불렀어요." 라고 최근에 만난 자리에서 그는 말했다. "내가 미해병대에 들어간 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나는 미해병을 좋아했고, 그들도 나를 좋아했어요."라고 그는 우쭐하며 말했다. "나는 미해병대에 종군하면서 한 순진한 중학생에서 어엿한 성년 남성으로 성장했습니다. 이게 다 미해병 덕택입니다."
맺음 말
현재 84세인 남충일 님은 그동안 대학을 나와서 결혼했고 은행원을 거쳐 큰 회사의 사장까지 지내는 성공을 했다. 그동안 그는 40여 개 국에 비즈니스 출장을 수없이 많이 했고, 미국에도 여러 번 갔었다. 그는 딸 셋을 두었고 손자 손녀 5명과 증손녀 하나까지 두었다.
"미해병은 자랑스럽고 나 또한 자랑스럽다." 고 그는 말했다.
셈퍼 피(Semper Fidelis 언제나 충실한. 미해병대의 모토), 쟈니!